‘선천’과 ‘후천’사이의 균형, Gliria Stein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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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Balance Between Nature and Nurture by Gloria Steinem
(‘선천’과 ‘후천’ 사이의 균형 by 글로리아 스타이넴)

Gloria Steinem 낭독 Audio
한국말 낭독과 번역:강혜신

Gloria Steinem은 미국에서 가장 오랜 기간동안 여권 운동을 한 사람입니다.
지금도 여성 이슈에 대해 대학 강연도 많이 하고 심포지엄이나 대담 프로그램에 많이 출연합니다.
NPR 방송의 에세이 시리즈 ‘This I Believe’에서 여자는 과연 여자로 태어나는 것인가 여자로 길러지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던집니다.

에세이 원본과 번역본
입니다.
A Balance Between Nature and Nurture

Is it nature or is it nurture, heredity or society? In that great debate of our time, conservatives lean toward the former and liberals toward the latter.
태어나는 것인가 그렇게 길러지는 것인가, 유전인가 환경인가?
이 시대 큰 논쟁에 대해 보수는 전자에, 진보는 후자에 기웁니다.

I believe both are asking the wrong question. I believe it’s nature and nurture, and this is why.
나는 보수와 진보가 모두 잘못된 질문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태어난 것이기도 하고 양육된 것이기도 하며, 유전이기도 하고 환경이기도 하다고 믿습니다.
이유를 말하지요.

I didn’t go to school until I was 12 or so. My parents thought that traveling in a was as enlightening as sitting in a classroom, so I escaped being taught some of the typical lessons of my generation: for instance, that this country was “discovered” when the first white man set foot on it, that boys and girls were practically different species, that Europe deserved more textbook space than Africa and Asia combined.
나는 12살 때까지 학교에 다니지 않았습니다. 내 부모님은 house trailer 여행이 교실에 앉아 있는 것보다 좋은 교육이 된다고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세대 전형적인 교육: 예를들면 미국은 첫 백인이 발을 딛음으로서 발견됐다던가 소년과 소녀는 서로 다른 종(species) 교과서에는 유럽이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합친 것보다 많은 분량이 실려야 마땅하다던가 하는 전형적인 교육을 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Instead, I grew up seeing with my own eyes, following my curiosity, falling in love with books, and growing up mostly around grown-ups — which, except for the books, was the way kids were raised for most of human history.
대신 나는 내 자신의 눈으로 내 호기심에 따라 세상을 보면서 자랐고 책을 사랑했으며 인간의 역사에 관한 책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어른과 섞여 생활햇습니다.

Needless to say, school hit me like a ton of bricks. I wasn’t prepared for gender obsessions, race and class complexities, or the new-to-me idea that war and male leadership were part of human nature. Soon, I gave in and became an adolescent hoping for approval and trying to conform. It was a stage that lasted through college.
말할 것도 없이 학교는 내게 높은 벽이었습니다. 성별이나 인종, 생활 차이에 집착하는 것에 준비되지 못했고, 전쟁과 남자 리더쉽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통념도 내겐 새로웠습니다. 나는 곧 내 생각을 포기하고 사회의 통념대로 살려고 했습니다. 그런 시기가 대학까지 이어졋습니다.

I owe the beginnings of re-birth to living in India for a couple of years where I fell in with a group of Gandhians, and then I came to the Kennedys, the civil rights movement and protests against the war in Vietnam.
인도에서 간디추종자 그룹과 깊이 교류하면서 나는 다시 태어나기 시작햇습니다. 그리고는 케네디 시대를 맞았고 인권 운동, 베트남 전쟁 반대 시대를 맞았습니다.

But most women, me included, stayed in our traditional places until we began to gather, listen to each other’s stories and learn from shared experience. Soon, a national and international feminist movement was challenging the idea that what happened to men was political, but what happened to women was cultural — that the first could be changed but the second could not.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은 나를 포함해 우리가 함께 서로의 경험을 듣고 나눌 때까지는 전통적인 통념 테두리에 머물렀습니다. 그 뒤 곧 전국적인, 국제적인 여권운동이 일어나 남자는 정치적이고 여자는 문화적이라는 사회통념에 도전했습니다. 남자가 정치적이라는 것은 바뀔 수 있었지만 여자가 문화적이라는 통념은 마꿀 수가 없었습니다.

I had the feeling of coming home, of awakening from an inauthentic life. It wasn’t as if I thought my self-authority was more important than external authority, but it wasn’t less important either. We are both communal and uniquely ourselves, not either-or.
그때서야 나는 집 같은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가짜같은 삶에서 깨어난 것 같았습니다. 내 스스로의 권위가 외부의 권위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햇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외부의 인정이 내 스스로 인정하는 것보다 덜 중요하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Since then, I’ve spent decades listening to kids before and after social roles hit. Faced with some inequality, the younger ones say, “It’s not fair!” It’s as if there were some primordial expectation of empathy and cooperation that helps the species survive. But by the time kids are teenagers, social pressures have either nourished or starved this expectation. I suspect that their natural cry for fairness — or any whisper of it that survives — is the root from which social justice movements grow.
그때부터 수 십년 동안 나는 어린이가 사회의 역할을 하기 전과 한 뒤의 변화를 그들에게 들었습니다. 일부 불공평함에 대해 젊은이들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인류가 생존하려면 공감과 협력이 절대적인 것으로 알려졋지만 어린이가 심대가 될 대쯤이면 사회적인 압박 때문인 지 생존하기 위해서인지 어린이들은 태생적으로 공정함을 부르짖었고 그것이 사회정의 운동을 자라게 한 뿌리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So I no longer believe the conservative message that children are naturally selfish and destructive creatures who need civilizing by hierarchies or painful controls. On the contrary, I believe that hierarchy and painful controls create destructive people. And I no longer believe the liberal message that children are blank slates on which society can write anything. On the contrary, I believe that a unique core self is born into every human being — the result of millennia of environment and heredity combined in an unpredictable way that could never happen before or again.
따라서 나는 더 이상 어린이는 이기적이고 파괴적인 창조물이여서 조직적이거나 고통스러운 컨트롤을 받아야 하다는 보수의 메세지를 믿지 않습니다. 반대로 나는 조직적이거나 고통스러운 컨트롤이 파괴적인 사람을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더 이상 어린이는 백지와 같아서 사회가 어떤 것이던지 채워 넣을 수 있다는 진보의 메세지도 믿지 않습니다. 반대로 모든 인간은 독특한 자아를 타고 난다고 생각합니다.- 환경과 유전이 예측하지 못하게 결합된 결과 똑같은 인간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다고 믿습니다.

The truth is, we’ve been seduced into asking the wrong question by those who hope that the social order they want is inborn, or those who hope they can write the one they want on our uniquely long human childhoods.
진실은 우리는 인간이 사회질서를 몸에 밴 채 태어나길 바라는 희망을 품은 사람들에 의해 잘못된 질문에 시달렸거나, 자신들이 어린이를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 수 있길 희망하는 사람들에 의해 잘못된 질문을 해왔다는 것입니다.

But the real answer is a balance between nature and nurture. What would happen if we listened to children as much as we talked to them? Or what would happen if even one generation were raised with respect and without violence?
진정한 답은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 사이에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어린이에게 말하는 것 만큼 어린이의 말을 들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만일 한 세대만 폭력없이 존중받고 자란다면 어떨까요?

I believe we have no idea what might be possible on this “Space Ship Earth.”
우주선을 타는 이 시대에 어떤 일이 가능한 지 상상되지 않습니다.

(Gloria Steinem is a journalist and social activist in the feminist, peace and civil rights movements. A fellowship to India in the late 1950s inspired her to fight for the rights of women and the poor. Steinem founded Ms. Magazine in 1972, and is the author of four books.)

Gloria Steinem Home Page
March 22, 1998: Why Feminists Support Clinton
(‘왜 여권주의자들은 클린턴을 지지하는가’)
Women Are Never Front-Runners
(힐러리 클린턴을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는 이유)

2 Responses to “‘선천’과 ‘후천’사이의 균형, Gliria Steinem”

  1. Joon says:

    바뀌는 진리가 있고 바뀌지 않는 진리가 있습니다
    속이기 위한 진리가 있고 속일 수 없는 진리가 있습니다

    속이기 위한 진리는 시대에 지역에 문화에 예절에 상황에 천지에 따라 변하지만
    속일 수 없는 진리는 그 무엇도 심지어 천지의 힘으로도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속이기 위한 진리는 인간을 양 떼마냥 이끌기 위해 만들어지고 꾸며진 이야기지만
    속일 수 없는 진리는 인간이 스스로를 이끌고 또 깨달음을 얻기 위한 지도입니다

    물질은 속임수지만 정신은 속일 수 없습니다
    형태는 속임수지만 성질은 속일 수 없습니다
    동공은 속임수지만 정공은 속일 수 없습니다
    속세는 속임수지만 내면은 속일 수 없습니다
    언변은 속임수지만..

    그렇다고 속임수는 나쁘고 진실만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변하는 것은 변하는 대로 변하지 않는 건 변하지 않는 대로 좋습니다
    이 둘은 항상 하나의 진리로서 분리될 수 없는 형태로 만물에 도사립니다

    저도 한 20년 동안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성경이나 불경 도덕경 등에 쓰여진 모든 옛 종교들이자 도술서들
    이런 것들은 시대에 뒤떨어졌기에 우리를 가로막는 악(惡)일 뿐이라고
    음(陰)의 시대에 걸맞지 않는 지나간 시대의 양(陽)의 종교들이라고
    그래서 음(陰)의 종교에 가담하고도 또 나 자신만 믿으면서 살아왔죠

    그런데 흥미로 조금씩 공부해온 전 지구상의 이론들이 쌓이고 쌓이더니
    어느 순간 알겠더라고요

    그것들은 지금도 다 한 곳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단지 서있는 곳이 각자 다르다보니 가르키는 방향이 다들 다를 뿐입니다
    우린 이제껏 그 다름에만 치중하고 그 변별력으로 인문을 키워왔지만
    이제는 그 같음을 알아차리고 그 속에서 스스로 진실을 발굴해야 합니다
    그것이 소위 후천시대인 이제에 와서야 드러났다는 것은 아이러니하죠

    저는 개종하지도 않았고 또 결코 그럴 일도 없지만
    이제껏 배척해온 종교들을 이해하고 포용하고
    무엇보다도 다른 종교들의 내면 속에 나의 종교가 살아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나의 종교의 내면 속에는 나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윗 분 말대로 세상의 눈으로 확신할 수 있는 건 사실 없습니다
    알 수 없는 미래와 진리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확신하는 것은
    과학 즉 물질과 속세의 흐름에 어긋날 수 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속변하는 시대에 항상 의심을 품고 바삐 머리를 굴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젠 심지어 종교도 그렇습니다. 누구 하나 믿을 게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속세에 속하지만 또 영력에도 속합니다
    인간는 우주에 속하지만 그 자체로 우주기도 합니다

    인간의 허상은 우리가 우주라고 알고 있는 이 세상에 따라 변하지만
    우주의 원리는 인간의 실상, 영혼, 그리고 본질이 하기 나름에 따라 변합니다
    저는 제 마음과 정신 그리고 행동에 따라 세상이 기적이 일으키는 걸 봤습니다

    천지현황이라 했습니다
    하늘(Nuit)은 검고 땅(Had)은 거칠다 했습니다
    대우주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검고 넓고 또 질서정연 합니다
    소우주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작고 많고 또 혼돈의 춤을 춥니다
    우리 종교는 물론 심지어 이집트 로마시대 사람들도 알고 있던 사실입니다

    단 하나의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겁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잘 살고자 하는 얘기고 다 잘 죽고자 하는 얘깁니다
    심지어 나를 악마나 중생으로 여기는 것들도 가만히 살펴보면
    나에게 진리를 거스르는 가르침을 선사할 수 없습니다

    인생은 하나의 책일 뿐입니다
    전 행복한 결말을 원하지만 사실 책을 읽는 그 자체로도 행복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힘들고 죽고 싶다 해도 살고자 하는 이유가 항상 생깁니다

    음이 있기에 양이 있고, 양이 있기에 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책은 시작과 끝이 있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저는 죽는 날 후회할지 안 할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한 때는 그것이 엄청 중요했던 적도 있었지만 이젠 그렇지 않습니다
    일시적인 후회와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유사성이던 무엇이던 길은 많고 도착지는 하나입니다
    조심성과 변별력은 잃지 말되 항상 자신과 자신의 선택을 신임해야 합니다
    대신 거짓과 진실을 분리하는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한국사람들이 후천시대라고 알고 있는 지금
    사실 거의 모든 종교 속에 그 힌트가 나열되어 있습니다

    공즉시색 색즉시공
    그대에겐 어둠도 어둡지 않으리라
    음을 고수하되 양을 포용하라

    다 같은 이야깁니다

    ———————————————————–

    소위 정신개벽의 시대가 왔습니다
    환절기에 감기 걸린다고 설마 죽기야 하겠냐면
    걸리면 조금 아파해야 할 겁니다

    후천시대가 도래한 지금 천년 이후에 대한 이야기도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아마 진짜 도술의 시대가 오기까지는 천년 정도 기다려야 할 겁니다
    지금도 곳곳에 그 씨앗이 뿌려지고 있습니다

    도와 술이 분리된 시기는 이제 지나갑니다

  2. kim insoo says:

    안녕하십니까.
    강혜신기자님의 번역 잘 읽었습니다.

    선천과 후천 사이의 균형을 잡자는 제언만 헀지,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할 것인가 하는 방법론은 빠져 있군요.

    저는 이 지구상에서, 확실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가 잘 안다는 듯, 무엇은 무엇이라고 정의를 내려 놓은 모든 것들을 일시에 수집해다가 한자리에서 불태워 버려야 한다고 생가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뱉어 놓은 앎이라는 것이 모두 다 “어림셈”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몇 세기만 지나면, 소위 진리랍시고 뱉어 놓은 “진리”들이 허접스런 쓰래기로 전환해 가거든요. 소위 이론이라고 하는 것들도 하나같이
    “적용성의 한계를 노출”하고 있거든요.
    영원히 옳고, 영원히 바른 진리는 인간의 능력으로 추출할 수 없습니다. 신이 나서서 뭐라고 해 놓은 것들도, 21세기에 들어서는, 하나도 옳고 정당한 게 없지 않습니까.
    신도 진리를 모르는데, 인간이 어떻게 영원히 옳고 영원히 바른 진리를 밝힐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삶에 가장 암적인 존재는 “유사성”입니다.
    인간들은 유사성을 가지고 “진리”를 체계화합니다.
    대중은 유사성으로 체계화한 그 진리 체계를 환영합니다.
    그러다보니, 너나 나나 엉터리 진리를 머리 위에 얹고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는 날에 임하여 후회를 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헛된 인생을 살았구나”
    헛된 인생을 살지 않으려면, 유사성에 부화뇌동해서는 안 됩니다.

    강기자님, 안녕히 계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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